열심히 살면 삶이 나아진다는 믿음은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움직여 온 강력한 엔진이었지만, ‘해야 한다·할 수 있다·하면 된다’라는 신화는 이제 균열을 맞이하고 있다. 나태와 게으름이 ‘더 나은 삶’이라는 보상과 연결되지 못한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사회는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과로를 미덕처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성장 둔화, 치열한 경쟁, 구조적 불평등 속에서 이 오래된 신화는 더 이상 모두에게 통하지 않으며, 개인의 삶과 사회 시스템을 함께 재점검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해야 한다’의 신화: 의무로 포장된 끝없는 자기 착취
한국 사회에서 ‘해야 한다’는 말은 단순한 조언을 넘어 일종의 도덕 명령처럼 사용되어 왔다. 공부해야 한다, 일해야 한다, 투자를 해야 한다, 관계를 관리해야 한다는 문장은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을 지배한다. 이 명령형 문장은 개인의 선택지를 줄이고, 마치 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이라는 공포를 자연스럽게 내면화시키는 기능을 한다. 특히 경제 성장기에는 ‘해야 한다’는 말이 가난 탈출과 계층 상승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며, 저축, 야근, 추가 학습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었다.
‘해야 한다’의 신화는 개인의 게으름을 최소화하고 생산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한때는 유효한 동력이었다. 산업화 시기, 장시간 노동과 고강도 학습은 실제로 소득과 지위 상승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같은 강도의 노력을 기울여도 모두가 같은 결과를 얻지 못한다는 사실이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다. 학벌·집안·지역·성별·고용 형태에 따른 구조적 격차가 크기 때문에, ‘해야 한다’라는 명령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성과 부족의 책임을 거의 전적으로 개인에게 돌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해야 한다’는 말은 동기부여가 아니라 죄책감을 생산하는 언어로 변질된다. 쉬면 안 될 것 같고, 멈추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이 만연해진다. 휴식마저도 효율과 생산성을 위한 도구로 포섭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은 곧 죄책감과 연결된다. 주말에도 공부를 ‘해야 하고’, 퇴근 후에도 자기계발을 ‘해야 하며’, 심지어 휴가 중에도 미래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따라붙는다. 그 결과 수면 부족, 만성 피로, 번아웃이 일상화되지만, 개인은 이를 인생 설계 실패로 받아들이며 스스로를 더 몰아붙이게 된다.
사회적 차원에서도 ‘해야 한다’의 신화는 위험한 부작용을 낳는다. 시스템의 결함, 정책의 실패, 불공정한 제도는 잘 보이지 않게 되고, “네가 더 열심히 했어야 한다”라는 말이 만능 해석이 된다. 청년 실업, 주거 불안, 비정규직 문제처럼 구조적 해결이 필요한 영역조차도, 당사자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치부되기 쉽다. 이때 ‘해야 한다’는 말은 개인을 움직이는 동력이 아니라, 시스템을 비판하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 사회는 변화하지 않으면서, 변화의 부담만 개인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해야 한다’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뒤에 숨은 주체가 누구인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말 나 스스로의 가치와 목표에 맞는 ‘해야 함’인지, 아니면 가족, 회사, 사회가 원하는 역할을 무비판적으로 떠안고 있는 것인지 구분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의무감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나를 소진시키는 방향으로만 작동한다면 한 번쯤 그 문장을 의심해 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야 한다’의 신화가 강력한 이유는 이를 어길 경우 발생할 것 같은 손실이 과장되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에 가지 못하면 인생이 끝난다는 식의 서사는 여전히 많은 청소년을 압박하고, 안정적인 대기업에 입사하지 못하면 평생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공포가 청년들을 옥죄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양한 경로와 직업적·생활상의 선택지가 존재하며, 하나의 표준 경로만이 유일한 성공 공식이라는 관념은 이미 시대와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다르게 살겠다고 선택한 사람들에게 따라붙는 ‘그래도 ~는 해야지’라는 말들이다.
이러한 언어 습관은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고 싶은 것’보다 ‘해야 하는 것’의 목록이 항상 먼저 떠올라 버리면, 삶의 주도권이 자연스럽게 밖으로 넘어가게 된다. 무엇을 감당할 수 있고, 어디까지가 나의 한계인지 탐색해 볼 기회 없이, 사회가 규정한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소화하는 데만 시간을 쓰게 된다. 나중에 돌아봤을 때, 열심히 살기는 했지만 정작 내 인생을 산 것 같지 않다는 허탈감을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야 한다’의 신화를 재검토하는 일은 단순히 동기부여 방식을 바꾸자는 차원을 넘어, 인생의 방향 설정 방식 자체를 다시 묻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모든 ‘해야 한다’를 일괄적으로 거부하는 것도 현실적이지 않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 돌봄 관계 속에서 책임져야 할 일, 시민으로서 감당해야 할 공적 의무는 분명 존재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왜,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를 각자가 스스로 정의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는 것이다. 저는 이 과정이야말로 성인이 된다는 것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남이 적어준 인생 계획표를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한계와 욕구, 가치관을 고려해 ‘해야 할 목록’을 스스로 편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의 피로도는 줄고, 선택의 감각은 회복될 수 있다.
‘할 수 있다’의 신화: 무한한 가능성과 잔인한 자기 책임
“너는 할 수 있다”는 문장은 표면적으로는 가장 따뜻한 격려처럼 들리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종종 잔인한 자기 책임의 언어로 기능한다. 이 말이 힘을 얻었던 시기는 분명 있다. 전쟁과 가난을 겪은 세대에게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구호는 실제로 삶을 바꾸는 실천의 언어였고, 공교육 확대·산업 발전·도시화와 맞물려 계층 상승의 경험을 제공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현실에서 ‘할 수 있다’는 말은 가능성을 열어주는 열쇠라기보다는, 실패의 책임을 개인에게만 묻기 위한 전제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할 수 있다’의 신화는 세 가지 전제를 공유한다. 첫째, 노력하면 누구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믿음, 둘째, 실패는 곧 노력 부족이라는 해석, 셋째, 개인의 능력은 무한히 확장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이 세 가지는 동기부여 책, 자기계발 강연, 기업 교육, 학교 상담 등 다양한 영역에서 반복된다. 문제는 이 전제가 구조적 제약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는 점에 있다. 출발선의 차이, 정보 접근성, 사회적 자본, 건강 상태, 돌봄 부담, 성차별·학력차별·지역차별 같은 요소는 ‘할 수 있다’라는 구호 아래 잘 보이지 않게 된다.
그 결과 개인은 실패했을 때 스스로를 끝없이 탓하게 된다. 취업에 여러 번 떨어진 청년은 자신의 역량과 성실성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과로 끝에 건강을 잃은 직장인은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고 자책한다. 이때 “원하면 뭐든지 될 수 있어”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압박으로 다가온다. 현실적으로는 무엇이든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동시에 그렇게 되지 못한 자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함께 따라붙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는 말이 가능성의 언어에서 결핍의 언어로 바뀌어 버리는 지점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할 수 있다’가 신자유주의적 경쟁 체제와 잘 맞물린다는 사실이다. 국가와 기업은 복지와 안전망, 고용 안정 등의 책임을 줄이는 대신, 개인에게 무한한 자기계발과 능력 개발을 요구한다. “당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말 뒤에는 “그러니 스스로를 끊임없이 갈고 닦으라, 그리고 실패하더라도 시스템 탓을 하지 말라”는 암묵적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스펙, 자격증, 다양한 경험의 리스트가 끝없이 늘어나지만, 정작 개인이 느끼는 안정감과 만족감은 쉽게 증가하지 않는다.
한국의 교육 현실도 예외가 아니다. 학생들은 이미 꽉 찬 시간표 위에 ‘하면 할 수 있다’는 논리로 각종 비교과 활동, 봉사, 인턴, 공모전, 대외활동을 덧붙인다. 이 과정에서 쉼과 놀이, 실패할 자유, 방향을 바꿔볼 여지는 사라진다. 처음에는 ‘할 수 있다’는 말을 믿고 달려보지만, 일정 시점이 지나면 누구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당신이 못나서가 아니라, 애초에 모두가 다 해낼 수 없는 구조였다”는 인식이지만, 현실에서는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는 자책이 먼저 떠오른다. 이때부터 ‘할 수 있다’는 말은 동기부여가 아니라 상처를 건드리는 말이 되고 만다.
저는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문장에 조건을 붙일 필요는 있다고 느낀다. “당신은 모든 것을 할 수는 없지만, 어떤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처럼 말이다. 혹은 “당신 혼자서는 어려울 수 있어도, 함께라면 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개인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연대와 제도적 지원의 필요성을 함께 말해줘야 한다고 본다.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대신, 현실적 가능성과 실패의 권리를 동시에 인정하는 언어가 필요하다고 느낀다.
‘할 수 있다’의 신화가 강하게 작동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못하는 것’을 숨기려는 문화가 형성된다.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에도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유능해 보인다는 압박, 도움이 필요해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긴다. 이로 인해 정신 건강 문제를 숨기고, 과로와 스트레스를 참다가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사례도 적지 않다. “나도 사실은 힘들다”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문화가 부재한 곳에서, ‘할 수 있다’는 긍정의 언어는 종종 침묵과 고립을 낳는다.
또한 ‘할 수 있다’는 말은 성공한 소수의 사례를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강화되곤 한다. 가난을 딛고 창업에 성공한 사람, 비정규직에서 대기업 정규직이 된 사람, 지방 소도시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의 이야기가 미디어와 강연을 통해 끊임없이 소비된다. 이들은 실제로 놀라운 노력을 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운과 환경의 요소도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서는 “나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만 남는다. 이 메시지는 감동을 줄 수 있지만, 다수의 실패한 사람들을 향해서는 “너는 왜 못했느냐”라는 비난으로 작동한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볼 필요가 있다. “누구든지 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왜 어떤 사람들은 노력해도 안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 질문은 개인의 태도나 마인드가 아니라, 제도와 구조의 문제를 드러내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정규직으로 전환될 확률과, 명문대 출신이 좋은 일자리를 얻을 확률은 출발선부터 다르다. 이런 차이를 인식하지 못한 채 ‘할 수 있다’만 반복하는 사회는, 불평등을 은폐하고 유지하는 데 일조하게 된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할 수 있다’의 신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담론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본다.
‘하면 된다’의 신화: 결과로 환원된 삶과 새로운 기준의 모색
“하면 된다”는 말은 한국식 근면 이데올로기의 정수에 가깝다. 이 말은 의지와 노력이 충분하다면 어떤 일이든 결국 성과를 낼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실제로 수십 년간 이 구호는 경제 성장과 수출 확대, 교육 열풍과 맞물려 많은 집단적 성취를 만들어냈다. 전쟁의 폐허에서 빠르게 일어나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 된 경험은, ‘하면 된다’는 신화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서 이 구호는 점점 더 많은 균열을 드러내고 있다.
무엇보다 ‘하면 된다’는 말은 결과 중심적 사고를 강화한다. 과정의 의미, 개인의 행복, 관계의 지속 가능성보다 ‘됐느냐, 안 됐느냐’가 평가의 중심이 된다. 시험에 붙었는지, 목표 매출을 달성했는지, 승진에 성공했는지가 인생의 주요 성취로 간주된다. 이 과정에서 목표 설정 자체가 점점 높은 기준으로 상향 조정되며, 한 번의 성공은 다음 성공을 위한 새로운 출발선으로 전락한다. ‘하면 된다’는 말이 어느 순간 ‘했으니 이제 더 해야 한다’로 바뀌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예를 들어, 포화 상태인 시장에서 모든 자영업자가 성공할 수는 없고, 구조조정이 예정된 산업에서 모든 노동자가 고용을 지킬 수는 없다. 출산율 하락과 고령화, 세계 경기 둔화, 기술 변화 등 거시적 요인들이 개인의 노력과 무관하게 삶의 조건을 바꿔놓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면 된다’는 구호만 반복하면, 실패의 원인은 다시 개인에게 돌아간다. 이처럼 신화가 현실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극심한 허탈감과 무기력을 경험한다.
또한 ‘하면 된다’의 신화는 실패를 경험할 권리를 박탈한다. 청소년기에의 방황, 진로 탐색, 직업 전환, 관계의 다듬어짐 같은 인생의 필수적인 시행착오마저도 ‘시간 낭비’나 ‘노력 부족’으로 해석된다. 대학 진학,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 인생의 여러 단계가 촘촘한 계획과 실천의 목록으로만 제시될 때, 거기서 벗어나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낙오자로 느끼기 쉽다. 특히 불안정한 노동 시장과 높은 주거 비용, 교육비 부담 속에서 청년 세대는 “해도 안 되는 경험”을 반복하며, 이전 세대와는 다른 회의감을 품게 되었다.
저는 ‘하면 된다’라는 말이 완전히 틀렸다고 보지는 않는다. 다만 이 문장이 유효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충분히 갖춰져야 한다. 둘째, 무엇을 했을 때 ‘된 것’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다양해야 한다. 지금처럼 경제적 성취와 지위 상승만이 ‘된 것’으로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이 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