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의 낭비와 인생, 돌이켜보는 시간
중년에 이르러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대개 비슷하다. ‘그때 좀 더 열심히 살았다면 어땠을까’, ‘쓸데없는 데에 청춘을 낭비한 것은 아닐까’ 하는 회한이다. 밤새 술자리에 몸을 맡기던 기억, 대책 없이 도시로 올라와 방 한 칸에서 꿈을 꾸던 시절, 사랑과 이별에 울고 웃으며 하루를 통째로 쏟아부었던 청춘의 장면들이 문득 떠오른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 시간을 대개 ‘낭비’라고 부르지만, 정작 그 낭비의 총합이 지금의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인생을 숫자와 성취로만 따지는 시각에서는 이런 청춘의 일들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시험 합격 여부, 승진 속도, 재산의 규모 같은 것들은 분명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중요한 축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백이 존재한다. 새벽에 듣던 음악 한 곡, 어떤 소설 속 문장을 필사하던 기억, 쓸쓸한 밤에 누군가에게 보냈다가 끝내 보내지 못한 긴 메시지 같은 것들이다. 이런 조각들이야말로 ‘산다는 것’의 결을 형성하는 실질적인 자산일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동안 그것들을 ‘헛된 감상’이라며 스스로 깎아내리곤 한다.
젊은 날을 돌아보는 중년의 회한에는 아이러니가 있다. 그때는 시간이 무한히 이어질 줄 알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믿었기에 과감할 수 있었지만, 정작 그 과감함은 나중에 돌아보면 무모함과 낭비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만약 그런 무모함조차 허락되지 않는 청춘이었다면, 우리는 지금의 후회 대신 전혀 다른 종류의 공허를 안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았을까. 적어도 ‘낭비했다’고 말할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것 자체가, 한때는 무엇인가를 온몸으로 사랑했고, 믿었고, 시도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중년이 되어 뒤늦게 깨닫는 것은, 인생이 계획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단순한 진실이다. 어느 지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던 길이 생기고,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삶의 궤도가 꺾이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은 흔히 ‘그때 공부를 더 했어야 했다’거나,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은 더 나았을 것’이라고 되뇌며 자신을 책망한다. 하지만 다른 선택을 했다고 해서 지금보다 덜 흔들리는 삶을 살았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아마도 또 다른 종류의 후회가 다른 자리에 자리 잡았을 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청춘의 시간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삶을 보는 관점이 바뀌기 때문이다. 젊을 때는 ‘더 높이, 더 빨리’만이 기준이었다면, 중년에는 ‘결국 어디까지 왔는가’보다 ‘어떻게 여기에 도착했는가’가 중요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반드시 시행착오와 방황, 낭비처럼 보이는 선택들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되었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비로소 후회만이 아닌 일종의 화해가 가능해진다.
개인적으로도 돌아보면, 꼭 필요했던 실패들이 있다. 그때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럽고 후회스러웠지만, 그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가치관과 태도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인생의 낭비 같던 시간들은, 시간의 흐름이 지나고 나면 다른 이름으로 다시 호출된다. 그것을 후회로만 남길지, 자산으로 전환할지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어떤 시선으로 과거를 바라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과 사랑, 낭만이 허락했던 젊은 날
젊은 날의 기억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종종 예술과 사랑이다. 열악한 자취방의 벽에 붙어 있던 영화 포스터, 중고 서점에서 어렵게 찾아낸 시집, 이어폰 너머로 들리던 밴드 음악 한 곡. 그것들은 당장의 생계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그 시절 우리에게 세상을 견디게 해주던 거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누군가는 시를 읽으며, 누군가는 영화를 보며, 또 누군가는 밴드를 결성하거나 동아리에서 연극을 올리며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계산과 이해타산이 앞서기보다, 그 사람 자체가 좋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을 걸어보던 시절이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 막차가 끊겨도 몇 정거장을 걸어가며 이어가던 대화, 정작 만나서는 별 말도 못 하면서 헤어지고 나서야 길게 메시지를 보내던 서툰 마음 표현. 그 모든 것이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때의 사랑은 성숙하지 못하고, 자주 상처를 주고받았지만, 동시에 삶의 온도를 높여주던 특별한 에너지였다.
중년에 이르러 이런 기억들을 돌이켜보면, 한편으로는 쓴웃음이 나온다. 차라리 그 시간에 자격증 하나라도 더 땄다면, 모아둔 돈으로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두었다면 하는 현실적인 계산이 고개를 든다. 예술과 사랑에 쏟았던 감정과 시간을 ‘비생산적인 낭비’로 규정해 버리는 것은 어쩌면 성숙이라 불리는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시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이 따라온다.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묻게 된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나는, 무엇으로 살아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라고.
낭만이라는 것은 결국 비효율을 기꺼이 감수하는 태도에 가깝다.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편지를 쓰고, 결과가 불확실한 고백을 감행하며, 아무 보상도 약속되지 않은 예술 작업에 밤을 새워 매달리는 일들. 효율만을 따진다면 어느 것 하나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비효율의 순간들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경험일 수 있다. 수익과 성취, 실용성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우리 삶에는 필요하고, 젊은 날은 그 ‘쓸모없음’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시기였다.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예술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다만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걸어버리는 열정 대신, 하루의 피로를 잠시 잊게 해주는 음악이나, 출근길에 건성으로 넘기던 기사 속 문장 하나에 위로를 받기도 한다. 사랑 역시 대단한 사건이라기보다, 함께 밥을 먹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상적인 동행의 형태로 다가온다. 겉보기에는 낭만이 사라진 것처럼 보여도, 사실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셈이다.
어쩌면 중년이 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젊은 날의 예술과 사랑, 낭만을 무조건 미화하거나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새로 정의하는 일일지 모른다. 그 시절의 무모함이 있었기에 지금의 현실 감각이 생겼고, 그때의 뜨거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온도 조절도 가능해졌다. 과거의 감정과 경험들을 모두 ‘낭비’라고 묶어 버리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의 역사를 삭제하게 된다. 그보다는 그 시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때의 눈으로 지금의 나를 잠시 바라보는 용기가 필요하다.
개인적으로는, 나이가 들수록 예전보다 더 자주 음악을 찾게 된다. 가사를 곱씹어 듣는 습관도 생겼다. 예전에 흘려듣던 노랫말들이 이제는 유난히 피부에 와 닿고, 소설 속 문장 하나가 하루의 방향을 바꿔놓기도 한다. 젊을 때의 예술과 사랑, 낭만이 폭발적인 불꽃 같았다면, 지금은 잔잔한 불씨처럼 오래가는 열에 가깝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한 것은 둘 다 우리 인생을 지탱해온 소중한 에너지라는 사실이다.
그래도 살아봐야지, 삼촌. 우리, 같이 살아보자
“아니 근데 어쩌겠어. 그래도 살아봐야지. 삼촌. 우리, 같이 살아보자.”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나 격려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 문장은, 이미 한 차례 인생의 곡선을 돌아본 세대와 이제 막 그 길목에 들어선 세대가 서로에게 건네는 일종의 약속이자 선언처럼 들린다. 젊은 날을 낭비했다고 자책하는 중년에게 이 말은, 더 이상 혼자서만 후회와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와도 같다. ‘그래도’라는 접속어에는 이미 상처와 실패, 우울의 시간이 전제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 살아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중년의 삶은 종종 ‘버티기’라는 단어로 설명된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직장에서의 위치도 쉽게 흔들릴 수 없으며, 건강과 노후에 대한 불안이 겹겹이 쌓여 간다. 이런 책임과 압박 속에서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굳고 마음이 닫힌다. 바로 이때 “우리, 같이 살아보자”라는 제안은 낭만적인 수사가 아니라 실질적인 생존 전략이 된다. 나 혼자서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 대신, 함께 버티고 함께 실수하고 함께 후회하자는 초대이기 때문이다.
‘같이 살아보자’는 말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다. 첫째, 우리는 이미 충분히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서로 인정한다. 둘째, 다시 상처받을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맺는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공유한다. 셋째, 성과나 효율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를 이유로 서로를 곁에 두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 모든 것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거의 낭비와 실패를 바라보는 눈부터 달라져야 한다. 그 시간을 견뎌낸 자신과 타인을 향해, 좀 더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
젊은 날의 나를 떠올리며 ‘그땐 몰랐다’고 말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그때 몰랐던 나를, 지금의 나는 이해하고 품을 수 있는가’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후배 세대나 주변 사람들을 보며 비웃거나 단정 짓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 “괜찮다, 그래도 한번 살아보자”고 말해주는 일은 훨씬 더 많은 용기와 경험을 요구한다. 이 말은 상대를 위로하는 동시에, 스스로에게도 다시 살아보겠다는 서약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라는 단어가 중요한 이유는, 인생의 어느 시점부터는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무게들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심지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까지도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삶을 지탱해 주는 기둥이 된다. 혼자서 완벽해지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서로의 불완전함을 감안한 채 함께 살아갈 방법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아마도 중년 이후의 삶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태도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같이 살아보자”는 말이 가진 힘을 자주 떠올린다. 누군가가 나에게 그 말을 건네주었을 때, 혹은 나도 모르게 그 말을 건네야 할 상황에 놓였을 때, 인생이 혼자 끌고 가야 하는 짐이 아니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젊은 날의 낭비처럼 보였던 시간들도, 결국은 누군가와 함께 웃고 울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오늘도, 내일도, 조금은 덜 두려운 마음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맺음말: 낭비였던 시간과 함께 살아갈 다음 장
젊은 날의 낭비처럼 느껴지는 시간들, 예술과 사랑, 낭만에 모든 것을 걸었던 순간들은 결국 지금의 우리를 만든 재료였다. 중년의 회한은 어쩌면 그 재료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신호에 가깝다. 과거의 실패와 방황을 전부 지우거나, 반대로 전부 미화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고,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를 잇는 고리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래도 살아봐야지. 우리, 같이 살아보자.”라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다음 장을 여는 문장이다.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에 대한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오늘을 무너지지 않고 통과하기 위한 소박한 다짐에 더 가깝다.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내 옆의 누군가에게 이 말을 건넬 준비를 하는 것, 그리고 언젠가 내가 이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스스로를 덜 몰아붙이는 것이다. 젊은 날의 낭비까지도 끌어안고, 예술과 사랑, 낭만과 회한을 지나온 우리가 함께 살아갈 다음 장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그것을 어떻게 채울지는, 바로 지금 우리의 선택과 태도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