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 골동품에서 발견한 기억, 콜라주로 이어 붙인 역사
동묘 벼룩시장과 골동품 가게에는 한국 현대사의 다양한 층위가 뒤섞여 있다. 오래된 가계부, 흑백 가족사진, 누군가의 이름이 적힌 교과서, 그리고 황색으로 바랜 신문 조각들은 모두 한때 누군가의 일상이자 현재였다. 작가 맨디 엘-사예가 이처럼 주변부로 밀려난 사적인 유물을 수집해 콜라주로 재구성하는 행위는, 사라져가던 기억들을 새로운 맥락 속에서 다시 호명하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동묘 골동품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단순한 수집가의 호기심에 머무르지 않는다. 맨디 엘-사예는 영국에서 활동하지만, 동묘가 가진 독특한 기억의 밀도를 ‘도시의 비공식 아카이브’로 이해한다. 대개 미술관이나 공공기록관에 보존되는 것은 국가나 제도가 선택한 역사이지만, 동묘의 물건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적 기록의 집합체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제도권 기록의 틈새에서 배제된 목소리를 복원하는 작업으로도 해석된다.
콜라주라는 형식은 이러한 복원 전략과 긴밀히 연결된다. 콜라주는 원래 흩어진 이미지와 텍스트를 서로 다른 맥락에서 끌어와,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는 기법이다. 동묘에서 발견한 영수증과 신문, 편지와 사진을 한 화면 위에 겹쳐 붙일 때, 각각의 단편적인 조각은 더 이상 개인의 사소한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특정 시대를 살아낸 집단의 정서와 정치를 드러내는 증언이 된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신문 경제면과 어느 가족의 1973년 설날 사진이 한 화면에서 조우하면, ‘경제 성장’이라는 추상적 구호 뒤에 놓인 일상의 긴장과 욕망이 구체적인 얼굴을 갖는다.
개인적으로 동묘를 걸을 때마다, 가격 흥정을 하는 소리 너머로 이름조차 모르는 누군가의 삶이 은근히 느껴진다. 맨디 엘-사예의 콜라주 작업은 그 익명의 삶에 잠시나마 얼굴을 부여하는 듯해, 오래된 물건들을 ‘쓰레기’가 아니라 ‘증언자’로 보게 만든다. 동시에 그 증언이 나 자신의 기억과 어떻게 겹치는지, 나 역시 언젠가 누군가의 골동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
맨디 엘-사예가 동묘 골동품에서 특히 주목한 것은 ‘작은 서사’다. 유명인의 사인이나 정치적 사건의 1면 기사보다, 이름 모를 노동자의 출근 카드, 시험지 귀퉁이에 적힌 낙서, 누군가의 손때가 잔뜩 묻은 레시피 메모가 그의 시선을 오래 붙든다. 이런 선택은 곧 역사 서술의 방향 전환을 의미한다. 더 이상 ‘위대한 업적’이 아니어도, 한 사람이 하루를 버티기 위해 적어 내려간 장보기 목록과 월세 고지서가 그 자체로 시대의 진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동묘 골동품은 맨디 엘-사예에게 있어 ‘사라진 사람들을 위한 비공식 기념관’에 가깝다. 그는 콜라주 작업을 통해 물건에 남은 흔적, 즉 볼펜의 눌림, 종이의 찢긴 방향, 사진의 색 바램 등 미세한 물질적 디테일을 확대해 읽어낸다. 그 과정에서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 배열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서사를 암호처럼 담게 된다. 한 장의 문서에 남겨진 수정 테이프 자국은 의도적으로 지워진 문장을 암시하며, 그 빈 자리는 관객 각자의 상상과 경험으로 채워진다.
콜라주에 동원되는 신문 조각 역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신문은 특정 시기의 사회적 우선순위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떤 사건이 크게 다뤄지고, 어떤 이슈가 뒷면 작은 기사로 밀려나는지의 차이는 그 시대 권력이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잊고자 했는지 말해준다. 맨디 엘-사예는 지면에서 주변부에 놓인 기사들, 혹은 독자의 편지, 유머란과 같이 사소해 보이는 조각을 의도적으로 확대해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이는 ‘공식적 서사’의 주변부에 머물던 목소리를 시각적 중심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이다.
이러한 방식은 결과적으로, 기록의 위계를 전복한다. 국가와 언론이 선택한 ‘큰 이야기’보다, 개인이 남긴 휘갈김과 소소한 기록이 작품 안에서 더 강한 존재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작품을 보며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라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출발해, ‘왜 이들의 기록은 사라질 뻔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아가 나의 일기장, 메신저 대화, 영수증 역시 비슷한 운명을 맞을 것이라는 자각도 뒤따른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예술이 역사 서술의 독점 권한을 제도에서 빼앗아 오는 과정처럼 느껴진다. 공인된 기록만이 ‘역사’가 아니라면, 나와 같은 보통 사람의 흔적도 언젠가 누군가의 콜라주에서 역사의 한 조각으로 발굴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상만으로도, 평범한 하루의 메모조차 함부로 버리기 어려워진다.
신문과 콜라주, 사라진 목소리를 봉합하는 정치적 장치
맨디 엘-사예 작업의 핵심 문장인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는, 그의 콜라주가 단순히 정서적인 향수나 개인사 복원에 머물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동묘에서 모은 신문들은 대부분 누군가의 집, 사무실, 공장 구석에서 시간을 견디다가 시장에 나온 것들이다. 이 신문 조각에는 특정한 이념이나 국가 홍보 문구뿐 아니라, 가격표, 민원 기사, 사고 소식, 구인광고 등 현실의 미세한 권력 관계가 촘촘히 배어 있다.
엘-사예는 이 신문 조각들을 해체한 뒤, 서로 다른 시기의 조각들을 한 화면에 겹겹이 쌓는다. 예를 들어 노동 운동 관련 작은 기사 옆에 가정용 전자제품 광고를 두고, 그 위에 손글씨가 적힌 영수증을 붙이는 식이다. 이 조합은 ‘노동’, ‘소비’, ‘가계 경제’가 분리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얽힌 구조임을 암시한다. 관객은 특정 연도의 기사에 묶이지 않고, 시대를 가로지르며 반복되는 구조적 문제를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엘-사예 작업의 가장 정치적인 지점이라고 느껴진다. 미술관 벽에 걸린 한 장의 콜라주가 통계 그래프보다 더 설득력 있게 구조적 불평등과 소외를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은 꽤 인상적이다. 숫자는 쉽게 잊히지만, 찢겨진 신문과 손때 묻은 메모가 담긴 화면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예술의 설득 방식이 얼마나 감각적이고 직접적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신문이라는 매체는 본래 ‘지금, 여기’의 사건을 기록하는 장치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신문은 곧 잘 버려지고, 포장지로 재사용되거나 먼지 쌓인 더미 속에 방치된다. 엘-사예의 작업은 바로 이 순간을 포착한다. 버려진 신문 더미 속에서, 그는 사회가 더 이상 주목하지 않는 이슈와 이름을 다시 끄집어낸다. 특히 사고 기사나 사회면 한구석에 자리한 짧은 칼럼, 독자 투고는 그의 콜라주에서 늘 중요한 재료가 된다. 이는 언론이 한 번 보도하고 잊어버린 개인의 비극과 분노, 문제 제기가 다시 한 번 공적 장으로 귀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엘-사예가 신문 조각 위에 동묘에서 수집한 사진, 편지, 수기 등을 덧붙이는 행위는 문자 그대로의 ‘봉합’이다. 서로 다른 서사 조각들은 화면 위에서 실질적으로 접착제로 묶이고, 관객은 그 경계선을 따라가며 여러 시대와 계층의 기억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이때 콜라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에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꿰매는 바느질 행위와 닮아 있다. 찢어진 자국은 숨기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며, 그 균열 자체가 폭력과 망각의 흔적으로 읽힌다.
또한 그는 종종 신문 활자의 일부를 의도적으로 가리거나 지워, 읽히지 않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가려진 단어와 문장은 관객의 상상에 맡겨지는데, 역설적으로 이 ‘빈칸’이 더 큰 정치성을 획득한다. 무엇이 지워졌는지, 누가 지웠는지를 추측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검열과 자기검열, 구조적 침묵을 떠올리게 된다. 그 위에 덮인 개인의 사진이나 메모는, 지워진 문장 너머의 실제 사람들을 환기한다. 이렇게 콜라주는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기억과 망각의 정치학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나는 이러한 방식이 오늘날의 디지털 환경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고 본다. 온라인 기사와 SNS 게시물은 쏟아지지만, 알고리즘은 금세 관심사에서 벗어난 이슈를 화면 밖으로 밀어낸다. 아날로그 신문이 포장지로 사라지듯, 디지털 뉴스 역시 스크롤 아래로 가라앉을 뿐이다. 엘-사예의 콜라주는, 이 무한 스크롤의 시대에 우리가 어떤 목소리를 지나치고 있는지 되묻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우리에게도, 자신만의 ‘콜라주적 읽기’가 필요할지 모른다.
지워진 역사 복원과 기억의 정치학, 동묘에서 세계로
맨디 엘-사예의 작업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관건은, 그가 영국에서 활동하며 다양한 문화권의 기억과 역사를 교차시킨다는 점이다. 동묘에서 수집한 골동품과 신문은 한국의 특정 시대를 가리키지만, 그가 작품에서 호출하는 기억의 정치학은 어느 한 지역에 한정되지 않는다. 식민 경험, 산업화, 이주와 노동, 젠더와 계급의 문제는 다양한 언어와 지리적 배경 속에서 반복된다. 콜라주라는 형식은 이런 중첩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에 적합하다. 한 화면 안에 한국어 기사, 영어 메모, 아랍어 문장 조각이 뒤섞일 때, 관객은 서로 다른 역사가 의외로 비슷한 균열과 상처를 공유하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그가 강조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문장은, 바로 이 지점에서 국제적인 공명을 얻는다. 개인의 일기장과 가족사진, 생활문서가 특정 국가의 상징을 넘어, 불평등과 폭력, 생존의 감각을 공유하는 보편적 텍스트로 확장되는 것이다. 동묘에서 건져 올린 한 사람의 기록은, 런던이나 베이루트, 카이로 혹은 다른 도시의 누군가에게도 자기 경험을 투사할 수 있는 거울이 된다. 콜라주 화면은 결국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던진다.
나는 이 지점에서 콜라주를 하나의 ‘공동 기억의 실험장’으로 본다. 특정 국가, 특정 시대의 경계를 넘어서, 서로 다른 개인의 서사가 한 화면에 섞이고 또 충돌한다. 관객은 작품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끌어와 빈자리를 메우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어쩌면 콜라주는 완성된 기록이 아니라, 계속해서 쓰이고 고쳐지는 초안에 더 가깝다. 이 느슨함이야말로, 폐쇄적인 역사 서술이 놓쳤던 수많은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는 조건인지도 모른다.
동묘 골동품과 신문을 활용한 엘-사예의 작업은, 기록을 둘러싼 권력 관계를 되묻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한다. 우리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전시된 과거’를 감상하는 관람자가 아니라, 조각난 기록들을 읽고 연결하며 스스로 이야기를 구성하는 참여자가 된다. 이 과정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나의 오늘은 어떻게 기록되고 있는가, 어떤 부분은 과도하게 남겨지고 또 어떤 부분은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SNS에 남긴 기록과 메신저 대화, 삭제해버린 사진은 훗날 누군가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 이런 질문들은 꽤 불편하지만 동시에 생산적이라고 느껴진다. 기록을 남기는 습관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선택일 수 있고, 무엇을 버릴지 결정하는 행위도 권력 작용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엘-사예의 콜라주는 그저 과거를 향한 향수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어떤 미래의 기억을 만들고 있는지 점검하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다. 결국 동묘 골동품과 신문 조각을 매개로 한 그의 작업은, 과거·현재·미래의 기억을 동시에 사유하게 하는 예술적 실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동묘는 더 이상 특정 도시의 특정 시장으로만 남지 않는다. 작가의 시선을 통해 동묘는 세계 곳곳의 벼룩시장, 재래시장, 중고상점과 연결되는 상징적 공간으로 확장된다. 자본과 제도가 선택하지 않은 물건과 기록이 모여, 또 다른 역사를 속삭이는 장소 말이다. 맨디 엘-사예의 작업은 그 속삭임을 또렷한 목소리로 증폭하는 스피커와도 같다. 그의 콜라주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기억하길 원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잊고 있는가.”
맺음말: 동묘 콜라주가 여는 기억 읽기의 다음 단계
동묘 골동품과 신문을 수집해 만든 맨디 엘-사예의 콜라주 작업은, 사라진 개인의 기록과 주변부의 역사를 다시 봉합해 지워진 목소리를 드러내는 시도다. 그는 오래된 사진과 메모, 신문 조각을 한 화면에 겹쳐 붙이며,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는 믿음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 결과, 개인의 사소한 일상은 제도권 기록이 포착하지 못한 시대의 정서와 구조적 문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