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기훈에게 회화 작업은 유년 시절 자연 속에서 집과 배를 만들며 이어가던 모험의 ‘놀이’가 현재까지 확장된 과정이다. 그의 고향인 강원도 동해의 풍경은 시멘트 공장에서 피어오르던 색색의 연기와 함께 기억되며, 이는 화면 속 독특한 색과 구조의 원천이 된다. 이 글에서는 동해 시멘트 공장의 색 연기와 어린 시절 놀이 경험이 어떻게 그의 회화 세계를 형성했는지, 그리고 그 의미가 동시대 미술과 관람자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살펴본다.
동해 ‘시멘트’ 공장의 색 연기가 만든 풍경의 기억
강원도 동해는 바다와 산이 맞닿은 도시이자, 시멘트 공장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로 기억되는 산업 도시의 얼굴을 동시에 지닌다.
작가 이기훈의 회화 세계는 바로 이 이중적인 풍경에서 출발한다. 자연의 푸른 바다와 산, 그 위를 가로지르는 회색·분홍·누런빛의 연기는 어린 시절 그의 눈에 독특한 색의 층위와 추상적인 형태로 각인되었다. 이는 훗날 화면 위에서 낯설지만 어딘가 친숙한 색 조합, 겹겹의 레이어, 흐릿하게 번지는 경계로 되살아난다.
시멘트 공장의 연기는 일반적으로 환경 문제나 산업화의 상징으로 다뤄지기 쉽지만, 이기훈의 작업에서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전환된다.
그에게 연기는 하나의 거대한 붓질이자, 하늘과 바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추상적인 선이다. 공장 굴뚝이 그려낸 공기 중의 선과 덩어리는, 어린 시절 그가 무심코 올려다본 ‘움직이는 그림’이었고, 이는 지금도 화면 곳곳에서 구름과 안개, 먼지와 빛의 형태로 반복된다. 산업과 자연, 오염과 풍경, 기억과 이미지가 겹쳐지는 지점에서 그의 회화는 고향의 복합적인 얼굴을 시각화한다.
또한 시멘트라는 재료가 지닌 상징성도 중요하다.
시멘트는 집을 짓고, 도로를 만들고, 도시를 세우는 기반 물질이자, 동시에 자연 지형을 파괴하는 산업 자본의 얼굴을 상징한다. 이기훈의 화면에서 시멘트는 물질 그대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색면과 두터운 질감, 거칠게 긁힌 표면 속에 은유적으로 배어 있다. 캔버스에 쌓이고, 긁히고, 다시 덧입혀지는 물감의 층위는 마치 산을 깎고, 자갈을 갈아 시멘트를 생산하는 반복된 공정처럼 느껴진다. 이 물질성의 기억은 동해의 풍경과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그의 작업을 단순한 풍경화가 아닌 ‘기억된 산업 지형의 회화적 기록’으로 자리매김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이 이기훈 작업의 흥미로운 특성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작가가 고향을 회상할 때 아름다운 바다, 푸른 산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시멘트 공장의 연기라는 다소 불편한 이미지를 정면으로 끌어안는다. 그 속에서조차 색과 리듬을 발견하고, 그것을 회화의 언어로 전환하는 태도는 유년기의 감수성과 동시대적 비판 의식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읽힌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그가 이 풍경을 단순히 사실적으로 재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화면 속 연기와 구름, 안개와 먼지는 모두 구체적인 장소를 지우고, 기억과 감각만을 응축한 형상으로 나타난다. 이때 고향 동해는 지도 속 지명이 아니라, 색과 형태의 잔향으로 존재한다. 덕분에 관람자는 “강원도 동해”라는 특정 지역을 모른다 해도, 자신의 어린 시절 풍경이나 산업화된 도시의 기억을 겹쳐 읽으며 작품 속 장면과 감정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
유년의 ‘놀이’가 회화 작업으로 이어진 창조적 모험
이기훈은 자신의 회화 작업을 “어린 시절 자연 속에서 집과 배를 만들며 모험을 이어가던 창조적인 놀이의 연장선”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문장은 그의 작업 태도를 이해하는 핵심 문장으로, 회화가 단순한 직업이나 기술이 아니라, 유년기의 놀이가 성인의 예술 행위로 확장된 과정임을 드러낸다. 강원도 동해의 산과 바다, 모래사장과 작은 개울은 그에게 거대한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나뭇가지와 돌, 버려진 나무판, 스티로폼 조각을 모아 집을 짓고 배를 만드는 행위는, 이미 일종의 설치미술이자 공간 구성의 실험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의 집과 배 만들기는 특히 ‘구성’과 ‘균형’의 감각을 길러주었다.
집을 지을 때는 비와 바람을 막을 수 있을지, 모래 위에 세운 기둥이 무너지지 않을지, 배를 띄울 때는 가벼우면서도 물에 가라앉지 않을 구조인지 끊임없이 시험해야 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캔버스 위에서 형태를 배치하고, 색의 무게를 조절하며, 화면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일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즉, 그는 놀이터에서 이미 조형 언어의 기초를 체득하고 있었고, 지금도 작업 과정에서 당시에 느꼈던 실험적 쾌감과 실패의 긴장을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이기훈의 작품을 살펴보면, 이러한 놀이의 흔적이 구체적 장면보다는 구조와 리듬으로 드러난다.
집의 형태를 연상시키는 삼각형과 사각형의 겹침, 배의 아랫부분처럼 보이는 곡선의 덩어리,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부유하는 구조 등이 그것이다. 화면 속 요소들은 현실의 집이나 배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지 않지만, 유년기의 조립과 해체, 만들기와 허물기를 반복하던 몸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이때 회화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행위”라기보다, “어렸을 때 몸으로 익힌 만들기의 감각을 다시 수행하는 과정”에 가깝다.
놀이의 중요한 특성은 ‘목적보다 과정이 우선’이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의 집과 배 만들기에서 완성은 언제나 임시적이었다. 파도가 치면 무너지고, 비가 오면 쓸려가며, 다음 날이면 새로운 구조를 다시 세워야 한다. 이기훈의 회화에서도 비슷한 태도가 읽힌다. 그는 한 번의 붓질로 그림을 결정하지 않고, 덧칠하고 지우고 긁어내는 과정을 반복하며 화면을 축적해 나간다. 이는 놀이에서 느꼈던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 “실패해도 괜찮다”는 감각을 회화적 방법론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 ‘놀이의 연장선’이라는 개념은 현대 미술 작가들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고 느낀다.
창작이 지나치게 결과 중심, 작품성과 시장 논리에 치우칠 때, 어린 시절의 놀이와 같은 순수한 몰입과 실험 정신은 쉽게 퇴색된다. 이기훈의 발언은 회화가 다시금 놀이의 자리로 돌아갈 때, 비로소 작가와 관람자가 모두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기시킨다. 관람자 역시 작품을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상상하고 탐험할 수 있는 ‘놀이 공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유년기의 놀이 경험이 자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집을 짓고 배를 만들던 장소는 콘크리트 놀이터가 아니라 숲과 모래사장, 돌무더기와 해변의 폐목재 더미였다. 자연은 그에게 무한한 재료 창고이자, 모험의 배경이었다. 이 경험은 그의 회화에서 자연을 단지 배경으로 그리는 차원을 넘어, 자연을 하나의 동반자로 느끼게 하는 정서적 바탕을 제공한다. 산업화된 동해의 풍경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자연과의 교감과 놀이의 감각을 놓지 않으며, 그 흔적을 화면 곳곳에 배치한다.
동해 ‘연기’와 ‘놀이’가 만드는 현대 회화의 새로운 서사
이기훈의 작업은 동해 시멘트 공장의 연기와 유년기의 놀이 풍경이라는 두 축이 서로 교차하며 현대 회화의 새로운 서사를 구성한다.
한 축에는 산업화의 상징이자 무거운 회색 이미지로 남아 있는 연기가 있고, 다른 한 축에는 자연 속에서 집과 배를 만들며 이어가던 가벼운 놀이의 시간이 있다. 이 상반되는 두 경험은 그의 회화에서 긴장과 조화를 동시에 만들어내며, 화면을 단순한 미학적 장식이 아닌 복합적인 기억과 정서의 장으로 변환시킨다.
우선 ‘연기’는 시간과 역사를 상기시킨다.
동해 시멘트 공장의 굴뚝에서 피어난 연기는 1970~80년대 한국 산업화의 한 장면과도 연결된다. 어린 시절 이기훈이 바라본 연기는 그때에는 그저 익숙한 일상 풍경이었겠지만, 지금 되돌아보면 지역 경제를 지탱한 산업의 상징이자, 동시에 환경 파괴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흐릿한 색의 층과 번짐, 먼지처럼 흩어지는 터치는 이러한 중층적인 의미를 품은 채, 산업화 시대의 흔적을 추상적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반면 ‘놀이’는 개인의 정체성과 상상력을 드러낸다.
집과 배를 만들며 전개된 유년기의 모험은 그에게 “세상을 새로 구성할 수 있다”는 감각을 심어주었다. 이것은 곧 회화의 본질과도 맞닿는다. 회화는 기존 세계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구성하는 행위다. 이기훈이 놀이의 연장선에서 회화를 이해하는 이유는, 그가 여전히 세계를 ‘다시 만들어 볼 수 있는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면 위에 쌓여가는 색과 형태는 어릴 적 나무조각과 돌을 쌓아 집을 짓던 기억의 또 다른 버전이다.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기훈의 작품은 관람자 각자의 기억과도 교차한다.
누군가는 연기를 보며 고향의 공장을 떠올리고, 또 누군가는 모래성 쌓기나 나무로 배를 만들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 작품은 특정 개인의 기억에서 출발했지만, 추상화된 형태와 상징을 통해 여러 사람의 삶과 연결되는 공감의 통로가 된다. 이는 회화가 여전히 유효한 서사 매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텍스트 없이도, 인터뷰를 읽지 않고도, 우리는 그의 화면을 통해 각자의 이야기를 덧입힐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기훈의 회화는 동시대 한국 미술에서 ‘지역성과 보편성’의 균형을 모색하는 작업으로 읽힌다.
강원도 동해라는 구체적인 장소, 시멘트 공장의 연기라는 특수한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이를 풍경의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고, 세계 어디에서나 공감 가능한 감정과 구조로 번역해낸다. 산업 도시의 연기, 어린 시절의 놀이, 자연과 물질의 갈등과 공존은 국경과 세대를 넘어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장될 여지가 크다. 이런 점이 그의 작업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 관객에게도 잠재적 공명 가능성을 지닌 이유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관람자가 그의 작품을 마주할 때, “이 장면을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정확히는 떠오르지 않는다”는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가 특정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는 대신, 많은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남아 있을 법한 감각의 잔상만을 화면에 남겨두기 때문이다. 공장 굴뚝, 바다, 모래사장, 숲, 집과 배의 잔해들이 하나의 장소로 명시되지 않은 채, 감정의 지형으로 재편될 때,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작품 위에 얹어 보게 된다.
동시에 그의 작업은 회화 매체 자체에 대한 성찰도 포함한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 놀이처럼 잠시 머물다 무너지는 것, 시멘트처럼 굳어 영속성을 지향하는 것들이 모두 한 화면 위에서 충돌하고 섞인다. 물감의 번짐과 굳음, 긁힘과 덧칠은 바로 이 상반된 시간성을 시각화한 결과다. 회화는 원래 변하지 않는 이미지를 남기는 장르로 여겨지지만, 이기훈의 화면은 마치 지금도 변화 중인 듯한, 아직 완전히 굳지 않은 시멘트 같은 상태를 보여준다. 그 사이에서 관람자는 “기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계속 다시 그려지고 지워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결국 동해의 연기와 유년의 놀이, 그리고 현재의 회화 작업은 하나의 긴 서사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어린아이가 모래사장에서 집을 짓고 배를 만들던 모습과, 성인이 되어 캔버스 위에 색과 형태를 쌓아 올리는 장면이 서로 겹쳐 보이게 된다. 이 연속성은 예술을 삶의 일부, 성장의 일부로 이해하게 만든다. 예술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는 특별한 재능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놀이와 실험, 실패와 상상의 연장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마무리: 동해의 풍경에서 시작된 회화적 모험, 그 다음을 향해
강원도 동해 시멘트 공장의 색 연기와 자연 속에서 집과 배를 만들며 모험을 이어가던 유년기의 놀이 경험은 작가 이기훈 회화 세계의 근원이자 핵심 서사다.
그의 작품은 산업과 자연, 무거운 연기의 기억과 가벼운 놀이의 감각이 겹쳐진 풍경을 통해, 개인의 기억을 보편적 정서로 확장하는 회화의 힘을 보여준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과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것, 놀이처럼 다시 시작될 수 있는 과정을 한 화면에 담아내며, 기억과 풍경, 예술의 관계를 끊임없이 질문하게 만든다.
다음 단계에서 관람자와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단순하다.
첫째, 이기훈의 실제 작품을 마주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찾아, 화면 속 색과 질감, 레이어의 물질성을 직접 체험해 보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유년기 풍경과 놀이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의 그림 속 장면과 겹쳐 보는 것이다. 셋째, 동해와 같은 특정 지역의 풍경을 넘어, 우리가 살아온 도시와 자연, 산업과 놀이의 기억을 회화라는 언어로 어떻게 다시 풀어낼 수 있을지 스스로 질문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이기훈의 회화는 단순히 한 작가의 작품을 넘어, 각자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창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