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로 뒤덮인 소녀 ‘앙’이 보여 준 박물학의 그림자
16세기 한 박물학자가 남긴 책 속에는 얼굴 전체가 털로 덮인 소녀의 초상화가 등장한다. 소녀의 이름은 ‘앙’으로,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는 ‘괴이한 기형’이자 ‘기록해야 할 희귀 표본’으로 인식되었다. 수레카 데이비스의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 역사』는 이 초상화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박물학과 인종적 차별의 기원을 파고든다.
당시의 박물학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객관적인 과학”의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유럽의 학자와 탐험가들은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고,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과 동물, 식물, 지형과 문화를 ‘분류하고 이름 짓는’ 작업을 수행했다. 여기까지는 과학의 태동처럼 보이지만, 문제는 그 분류가 ‘정상/비정상’, ‘문명/야만’이라는 서열화된 틀과 함께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털로 뒤덮인 소녀 앙은 그 대표적 상징이다. 그녀의 몸은 호기심의 대상이자 ‘다름’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증거물처럼 수집되었다.
수레카 데이비스는 앙의 초상화가 단순한 개인의 초상이 아니라, 유럽 중심의 지식 체계가 다른 인간을 어떻게 ‘박물관 속 존재’로 밀어 넣었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장치였다고 설명한다. 당시 박물학자들은 ‘특이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을 자료로 보았고, 그들의 목소리나 삶의 맥락은 철저히 배제했다. 앙의 얼굴은 그림 속에 남았지만, 앙이라는 인간의 감정과 경험, 일상은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 공백은 다름 아닌 권력의 결과였다.
이러한 시선은 곧 제국주의적 팽창과 맞물렸다. “이 사람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인식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전환되었다. 피부색, 얼굴 형태, 체모, 언어, 종교 등은 모두 분류의 기준이자, 차별의 근거가 되었다. 앙이 ‘특이한 존재’로 그려지는 동안, 비유럽인과 식민지 주민들은 집단적으로 ‘기묘한 인종’으로 상상되었다. 박물학의 책과 도판, 지도와 초상화는 이런 상상을 널리 퍼뜨리는 매체였다.
개인적으로, 이 지점에서 과학과 폭력이 어떻게 얽힐 수 있는지가 가장 섬뜩하게 느껴진다. ‘알기 위한 욕망’과 ‘지배하려는 욕망’이 같은 문장 안에서, 같은 그림 안에서, 같은 분류 체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한다는 점이 그렇다. 오늘날 우리는 유전학, 인류학, 의학을 말할 때 과학의 중립성을 당연시하지만, 그 토대가 어떤 인간을 배제하고 침묵시킨 역사 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앙의 사례는 또 다른 질문을 이끌어 낸다. 만약 그녀가 오늘날 태어났다면, 우리는 그녀를 어떻게 바라볼까. 단지 희귀 질환 환자로 분류하고 끝낼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특이한 외모’를 소비하는 인터넷 밈과 바이럴 영상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인지. 시대는 달라졌지만, 타인을 납작한 이미지로 소비하려는 충동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앙의 초상화가 박물학 책에 갇혔다면, 오늘날의 앙은 알고리즘과 조회 수에 갇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의 메커니즘과 역사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 역사』에서 수레카 데이비스는 “왜 인간은 이렇게까지 타자를 배척하는가”라는 질문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그 답은 단순한 증오감이나 무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질서’와 ‘안전’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다름을 정교하게 구분하고 위계를 만들어 온 역사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앙의 초상화는 그 시작점 중 하나일 뿐이다.
인류는 아주 이른 시기부터 ‘우리’와 ‘그들’을 구분해 왔다. 언어, 복장, 피부색, 종교, 먹는 것과 먹지 않는 것, 집의 형태와 거주 방식까지 모든 것이 구분의 재료가 되었다. 초기에는 생존과 직결된 구분이었을 수도 있다. 낯선 집단이 침입자일 수 있다는 불안, 전염병이나 자원 경쟁에 대한 두려움은 경계심을 낳았고, 그 경계가 차단과 폭력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주목하는 것은, 이런 원초적 감정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제도화되고, 이론화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유럽의 근대는 ‘다름’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서열화한 시대였다. 인종분류학과 두개골 측정, 피부색에 따른 위계 설정 같은 의사과학이 학문적 권위를 얻게 되었다. 이는 단지 학자들의 실험실에서만 통용된 것이 아니라, 법과 행정, 교육, 종교 담론에까지 스며들었다. “이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열등하다”는 서사는 노예제와 식민지배, 토지 약탈을 윤리적으로 합리화하는 데 동원되었다. 앙과 같은 개인의 ‘다름’은 점차 집단 전체의 ‘열등성’을 증명하는 도구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각적 재현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책 속 삽화, 박물관의 전시품, 여행기 그림, 지도 가장자리에 그려진 ‘기묘한 인간들’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을 하나의 고정된 이미지에 가둬 버렸다. 털이 많은 얼굴, 과장된 신체 비율, 이국적인 장신구 등은 시선을 사로잡는 동시에, 그들을 단순화하고 비인간화했다. 이 이미지들은 반복될수록 ‘사실’처럼 굳어져, 실제 사람들의 삶과는 전혀 다른 허구의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배척의 메커니즘이 항상 도덕적 언어와 함께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그들을 문명화해야 한다”,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 구분해야 한다” 같은 표현들은 모두 도덕적 포장을 두른 배제의 언어이다. 타자를 배척할 때조차 자신을 ‘선한 보호자’로 상상하는 인간의 심리는, 오늘날 온라인 혐오 담론 속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누군가를 공격하면서도 “공익을 위한 비판”이라고 주장하는 풍경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데이비스는 또한, ‘다름’을 지우는 동화(同化)의 논리 역시 배척의 또 다른 형태임을 지적한다. 표면적으로는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에게 “우리처럼 되라”고 강요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버리고, 이름을 바꾸고, 관습을 숨기고, 외모를 교정하는 방식의 동화는 결국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다. 앙의 털이 ‘정상적인 얼굴’을 기준으로 기형으로 규정된 것처럼, 각자의 배경과 특성이 하나의 기준에 의해 측정되고 교정된다. 이 지점에서 ‘배척’과 ‘동화’는 서로 대척점이 아니라, 한 몸의 두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앙, 데이비스, 그리고 오늘의 ‘차별의 인간사’ 읽기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잘못을 폭로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과거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비추는 거울에 가깝다. 16세기의 털로 뒤덮인 소녀 앙을 바라보던 시선과, 21세기 우리가 이민자, 장애인, 성소수자, 특정 인종과 국적을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 얼마나 많은 유사성이 있는지를 묻는다. 겉으로는 차별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정상성”이라는 좁은 기준을 유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누군가의 외모와 말투, 억양, 학력, 직업, 국적을 근거로 순간적인 판단을 내린다.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 판단이 훨씬 더 잔혹하게 드러난다.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 표현, 표현의 자유를 내세운 조롱, 클릭과 조회 수를 노린 극단적 콘텐츠는 새로운 형태의 ‘박물관’을 만들고 있다. 과거의 박물학자가 앙의 얼굴을 도판에 새겼다면, 오늘의 우리는 타인의 ‘다름’을 캡처와 짤, 댓글과 해시태그로 고정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실제 개인의 삶과 맥락은 또다시 삭제된다.
수레카 데이비스와 번역자 이영아는 이러한 연결고리를 한국어 독자에게도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한국 사회 역시 급격한 근대화와 산업화, 제국주의와 냉전의 경로를 거치며 독특한 ‘차별의 인간사’를 만들어 왔다. 계급, 지역, 학교, 성별, 장애, 외모, 이주 배경 등에 따른 서열화는 일상 깊숙이 스며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앙을 떠올리다 보면, 동시에 우리 사회의 수많은 ‘앙들’을 보게 된다. 이름 대신 혐오 표현으로 불리고, 맥락 대신 통계와 낙인으로 요약되는 사람들 말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치 중 하나는, 독자가 “나는 차별에 반대한다”라는 선언적 태도를 넘어서, 자신이 속한 지식 체계와 언어의 틀을 의심해 보도록 자극한다는 점이라고 느꼈다.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사용하는 단어들, 예를 들어 ‘정상’, ‘상식’, ‘일반인’, ‘문명국’, ‘선진국’ 같은 말 속에는 이미 수세기에 걸친 위계와 배제의 역사적 층위가 스며 있다. 책은 이러한 층위를 차근차근 파헤치며, 말과 개념을 다시 고르는 것이 곧 차별에 저항하는 첫걸음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 역사』는 또한, 차별을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낙관적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이 얼마나 집요하게 타자를 만들어 왔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이들이 침묵당하고 지워졌는지를 보여 준다. 이 냉정한 서술은 때로는 좌절감을 주지만, 동시에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만이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출발점임을 상기시킨다. 털로 뒤덮인 소녀 앙의 초상화를 다시 바라보는 일은, 지금 우리 곁에서 “다르다”는 이유로 고립되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일과도 겹쳐진다.
마무리 및 다음 단계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 역사』는 털로 뒤덮인 소녀 앙의 초상화에서 출발해, 박물학과 제국주의, 인종주의가 얽힌 복잡한 역사 속에서 인간이 ‘다름’을 어떻게 배척해 왔는지 추적한다. 수레카 데이비스의 치밀한 분석과 이영아의 번역을 통해, 과거의 과학과 지식이 어떻게 차별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그리고 그 유산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혐오와 배제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현재를 다시 보게 만드는 비판적 렌즈다.
다음 단계로, 독자는 이 책을 읽은 뒤 몇 가지 실천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첫째,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을 점검해 보며,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말습관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질문해 보자. 둘째, 미디어와 온라인에서 소비되는 ‘특이한’ 타인의 이미지가 어떤 맥락을 지우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셋째, 한국 사회의 역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된 차별 구조를 함께 공부하며, 교육과 토론을 통해 집단적인 인식 전환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이 글이 수레카 데이비스의 『다르면 배척하는 인간 역사』와 털로 뒤덮인 소녀 앙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책을 직접 읽으며 더 풍부한 사례와 분석을 접한다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정상성’과 ‘차이’의 기준을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야말로, 다름을 배척하는 인간사를 넘어, 다름을 존중하는 새로운 인간사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